작성일
2010.11.19
수정일
2010.11.19
작성자
현대중국문화연구실
조회수
728

(고혜림 서평) 옥시덴탈리즘

오해와 오독의 역사를 비추는 거울

-샤오메이 천(Xiaomei Chen)의 『옥시덴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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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메이 천

정진배 역

도서출판 강

2001년 4월


고 혜 림

  1. 오해의 역사와 옥시덴탈리즘을 논하며

 각기 다양한 문화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현재, 순수한 자국의 문화나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상황은 더 이상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무모한 도전과도 같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문화 자본 혹은 문화 텍스트들에 대한 연구가 단순히 반영적인 작업에서 이데올로기적 수행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이 시점에서, 순진무구한 사고방식은 전환을 요구받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서구의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들은 상당부분 서양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동양을 묘사한 내용이다. 매번 이들을 접할 때면 실소를 금치 못할 뿐 아니라 이토록 심각한 오해가 가로막고 있는가 하는 우려도 생긴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가 단지 서양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며 동양에서도 서양을 타자화 시키면서 일정부분 정치화된 문화텍스트들로 사용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런 측면에서 샤오메이 천(Xiaomei Chen)의 『옥시덴탈리즘』(2001)을 대하면서 동시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을 옆에 두고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샤오메이 천의 책을 넘기다보면 곧 저자의 책은 ‘옥시덴탈리즘’의 개념 자체에 대한 탐구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저자가 ‘옥시덴탈리즘’의 이해를 상식적 바탕으로 전제로 하면서 실제로 하려는 말은 무엇인가?

사이드는 서양에 의해 구성된 동양이라는 현상을 ‘오리엔탈리즘’으로 명명했으며 동시에 중국인들에게 있어서조차 ‘중국적’ 혹은 ‘순수하게 중국적인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오염되었거나 문화적, 비교문화적으로 전유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했다. 샤오메이 천은 ‘옥시덴탈리즘’을 통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오독과 날조에 대한 기본적인 방식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동양에서 서양을 오독한 사례들을 통해 상호간에 오해와 오독과 오용, 오염, 오역-유사한 개념은 모두 환영받는다-이 있었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저자는 옥시덴탈리즘이 비록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주로는 중국 국내 정치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중국 사회 내의 다양하고 경쟁적인 집단들에 의해 환기된 담론, 즉 억압 담론이며 해방 담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양이라는 타자는 중국의 상상력에 의해서 연역되었으며 저자는 서양이론의 렌즈를 통해 비서양적 현실을 재해석함으로써 비서양적현상이 서양적 용어와 서양적 관점에 의해서만 유의미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낼지도 모를 상황을 염려하고 있다.

『옥시덴탈리즘』은 국내 학계는 물론, 세계적인 유행이 되다시피 하고 있는 문화연구에의 흐름에 크게 일조하면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필적할 만한 문화연구 서적으로 등장했다. 이로써 우리는 줄곧 서양의 시각으로 바라본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새롭게 21세기의 시작을 열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서적은 이언 바루마와 아비샤이 마갤릿 공저의 『옥시덴탈리즘』(2007)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옥시덴탈리즘은 서구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촉발된 인식에 근거하고 있으며 다른 문명에 대한 편견이 증오와 살육전, 전쟁으로 번진다는 데 중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언 바루마, 아비샤이 마갤릿, 『옥시덴탈리즘-반서양주의의 기원을 찾아서』, (서울, 민음사, 2007))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옥시덴탈리즘과 샤오메이 천의 그것은 시각은 물론, 대상과 분석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샤오메이 천의 저작은 중국에 대한 해석과 새로운 독법을 제공하는 점에서 돋보인다. 또한 옥시덴탈리즘의 긍정적 역할을 통해 더 나은 상호 문화읽기를 종용하는 측면에서 차이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의 저자 샤오메이 천은 현재 UC Davis의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9년 Indiana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본서 외에도 Reading the Right Text: An Anthology of Contemporary Chinese Drama (Hawaii UP, 2003), East and West: Cross-cultural Performance and the Staging of Difference (Palgrave, 2001) 등의 저작이 있고, 현재는 Acting the Wrong Part: Theaters of Revolutions in Republican China: 1907 and Beyond and on an anthology of modern Chinese drama in English translation from 1907 to 2007을 집필 중에 있다. 저자는 『옥시덴탈리즘』에서 제3세계로서의 중국을 제3세계인으로서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이 모두 서로를 오해하고 있으며 비역사적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있음을 주로 다룬다. 장롱시(張隆溪)와 아리프 더릭의 이 책에 대한 평가에서도 살짝 엿볼 수 있는데, 전자는 비서양 타자의 대변인으로 적절한 발화를 했다는 평가이며 후자는 중국 출신이 아니고서는 비견하기 힘들 정도로 중국 지식인으로서의 적절한 역할을 높이 사고 있다. 저자도 책에서 밝히고 있지만 분명히 제1세계에 사는 제3세계 사람이 자아에 대해서 말하기란 타자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곤란할 뿐만 아니라 다분히 문제적이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어떠한 담론적 행위도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2. 모순인가 조화인가: 다양한 오해와 오독의 사례들

 오리엔탈리즘 혹은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용어는 그 스스로 자칫 대립적인 두 개의 개념어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 둘은 궁극적으로는 이항대립적 구조가 아니라 조화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샤오메이 천은 글을 쓸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곧 반관변적인 사안을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으며, 이들은 한 사회에서 문맹인 자들보다 명백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선 옥시덴탈리즘 내의 이항대립적 작용이 상반되게 역할했던 예를 TV 다큐멘터리『하상(河?)』 1988년 6월 11일 처음 방영된 6부작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물로 중국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큰 국민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시아쥔(夏駿)감독에 의해 연출된 이 다큐멘터리물은 중국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황하의 연원으로부터 서해에 이르기까지를 카메라로 비추면서,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중국의 역사를 조명하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영상물은 중국이 황하문명의 신화에서 벗어나 세계문명의 대열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국민들을 격동시켰다. 이로써 ‘사상해방’, ‘민주화’, 대외 개방‘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김시준, 『중국당대문학사조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9), 240~243.)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연극의 성공적인 관극무대 데뷔, 그리고 몽롱시 ‘몽롱시(朦朧詩)논쟁’ 혹은 ‘몽롱시 운동’으로 불려지던 1970년대 말 중국 전통 시단에 대해 규범과 틀을 재구성하려는 젊은 시인들의 움직임으로, 당시 시 창작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새로운 조류를 불러왔다.(홍즈청(洪子誠), 박정희 역, 『중국당대문학사』, (서울, 비봉출판사, 2000.11), 211~241.)에 관한 다양한 논쟁 및 중국 현대극의 상호문화적인 오독의 실례는 모두가 포스트 마오주의의 소위 신시기 중국에 있어서 수면에 떠오른 사회현상들로 대표된다. 우리는 곧 『하상』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당시 중국 사회에서 관변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되었으며 동시에 반관변 저항담론으로서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한 저자의 실증적 고찰을 따라가게 된다. 6장의 결론에서 이 책은 동양과 서양, 자아와 타자, 전통과 현대, 그리고 남성과 여성 등 서로를 나누는 이항대립을 조장하기보다는 모든 ‘진리’들의 다양성을 긍정하면서 유일무이한 절대적 진리만을 주장하지 않고 이항대립적인 항목들을 끊임없고 지속적인 대화 속으로 참여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여타한 것들을 모두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고서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옥시덴탈리즘과 관련한 열린 논의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책을 가로지르는 저자의 중층적인 입장은 일관적이고도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즉 저자는 동서양 각자에게 ‘타자’인 모든 것을 그것의 적절한 맥락 속에서 인식하고 새기기 위해 고립적이고도 그 자체로 완결적인 개념화의 욕망에서 벗어날 것과, 하나의 개념이 사용되는 과정과 그 결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탐색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김용규는 “사실 이론이 자신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폐해는 시작된다”고 말한다. 김용규, 『문학에서 문화로』, (서울, 소명출판, 2005), 21. 그가 강조하는 맥락에서의 텍스트 읽기는 샤오메이 천의 글에서도 유사한 의미로 등장하고 있다.

 문화교환이 가능하지도 않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던 毛澤東 직후 중국 사회에서 다양한 독자집단이 시적 모더니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해’였다.……지난 수십 년간 중국과 서양 사이의 문화간 문학 관계는 상당 부분 이러한 ‘오해’를 통해 가능했다.(143-144)

이와 같이 김용규와 샤오메이 천의 글은 각각이 영국과 중국의 상황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텍스트 자체가 어떠한 맥락에서 읽혀지는가, 그것이 탄생의 시점에 속했던 맥락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의미규정에 있어서는 유사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이론과 정치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이라 주장하면서 문학비평을 ‘문학적인 것’에 대한 제도화된 규범에 따라 텍스트를 선택, 처리, 정정, 개정하는 정치적 행위로 규정한 테리 이글턴, 김명환 외 역, 『문학이론입문』, (서울, 창작과비평사, 1986), 249. 테리 이글턴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글턴의 주장이 관념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띠긴 하지만 문학이 처한 제도와 실천적 현실 간의 관계는 더 이상 순수하게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김용규, 『문학에서 문화로』, 390. 샤오메이 천의 ‘오해’는 테리 이글턴의 ‘정치화된 문학’과도 상당히 닮아있는데, 즉 이미 이런 것들은 정치적 주도 이데올로기를 장악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은 이러한 현상의 발생과 흐름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결론에 동일하게 이르게 된다.

너무나 빨리 성숙하여 때 이른 정체성을 초래한 ‘상(?)’의 문제는, 1980년대 말의 『하상』에서 암시되고 내포된, 혹은 직접적으로 언급된 중국의 고민만은 아니다. 현재 급속도로 산업화되어 경제적 발전을 따르지 못하고 문화지체로 고생을 하고 있는 현재 중국 사회와 문화에 있어서도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로 해석될 가능성을 충분히 담고 있다. 이는 관변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되고 마오주의에 의해 욕망의 분출구를 찾지 못했던 중국 대중에게 1980년대 말 과연 논란이 될 만한 하나의 텍스트로 등장했던 것이다. 『하상』의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역할은 중국이나 중국민중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서양이라는 타자를 매개로 관변 이데올로기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서양을 ‘반제국주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오히려 동양이며 이로써 동양은 신중한 ‘오해’를 통해 자국에서 정치적으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던 것이다.(106) 『하상』이 서양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창조하고 전파했다는 것은 명확해 보이며, 이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동기부여된 문화적 타자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옥시덴탈리즘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60)

문화 제국주의의 대표적 상징물인 셰익스피어는 억압되었던 관변 옥시덴탈리즘에 대한 저항과 반관변 정서를 포괄하며 제국주의의 산물이 아닌 서양이라는 타자로서 마오주의와 포스트 마오주의를 잠식시키는 효과적인 매개물로 작용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원래적 의미와 중국에서의 의미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수백 년 이상의 역사적 거리를 두고 있는 이 동일한 연극공연이 런던에서 베이징으로 옮겨오면서 어떠한 전유를 거쳤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장샤오양(張曉陽)의 말을 물론 일부는 찬성하지만 오류가 있음을 반박하고 있다. 만약 장샤오양의 주장대로라면 중국 대중이 충분하고 완벽하게 셰익스피어를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갖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성립이 되지 않는데, 결국 중국 대중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비역사적으로 ‘정확성’과는 무관하게 수용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는 드러났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국의 문학적 생산, 특히 몽롱시를 둘러싼 비평 논쟁은 서양의 오리엔탈리즘만큼이나 뿌리 깊은 중국의 서양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와 옥시덴탈리즘에 근거하고 있고 또 좌우되고 있다는 주장에 기대어 논의는 진행되며 이 부분은 3장에서 주로 다뤄지고 있다. 저자는 “중국비평가들이 몽롱시를 자기 표현적인 것으로 ‘오해’했으며 이러한 ‘오해’는 서양 모더니즘의 ‘오독’에서 파생된 것”(135)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서양의 시학에서 더 이상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무렵,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서 오독되었던 중국의 시들이 다시금 역수입되는 현상도 발생했다. 저자는 사실 몽롱시의 발생과 그 형식에 대해서는 서구의 모더니즘과 시기적으로 우연한 일치를 보였을 뿐이며, 한마디로 시인들과 비평가들의 세대 차이에 의해 난해하고 퇴폐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던 몽롱시에 대한 재평가를 요청하는 최근의 흐름에 힘을 싣고 있다.

중국 현대극에 표현된 다양한 옥시덴탈리즘과 서양의 중국 전통극 수용에서 표현된 다양한 오리엔탈리즘은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동양과 서양 문학사의 형성에서 불가분의 요소로 존재한다. 서양과 동양의 연극 전통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담론들은, 중국 연극을 완벽하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서양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201) 말하자면 최근의 중국 작가들에게 전통은 중국적인 동시에 서양적이며 동양적인 동시에 서양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충격이 내포되어 있다. 상상되었든 혹은 주입되었든 민족주의와 전통주의에 대한 고집에 대단한 중국인 학자로서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전통이라고 믿고 있던 것의 뿌리부터 뒤흔드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이 구미의 중국학자들이든 중국 내의 학자들이든지 간에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분야에서 정전화 되어왔거나 이미 전통으로 굳어진 많은 부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순수한 모습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 그 충격은 상당할 것이다.

3. 추상적 사유에서 현실적 담론의 공간으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 제국주의의 동양에서의 효과적인 전파와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면 옥시덴탈리즘은 동양이 서양을 오독하고 오역하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옷을 입든지 문화교류의 이름을 달았던지 간에 동서양간의 침투요소의 완전배제는 불가능한 소망이다. 이미 순수하게 동양적인 것과 순수하게 서양적인 것은 존재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다문화적 전통을 반영하는 방식의 문학과 해석이 인기를 모으는 이때, 순수한 문화적 적/서자 따위를 주창하는 일은 대중으로부터 괴리되고 소외받기 십상이다. 순수한 것을 주장하는 것만큼 단순한 텍스트의 해석을 붙잡고 있는 것도 더 이상 유효한 방법론은 아니다. 문화연구는 단순히 문화이론이나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문화생산자로서의 역할까지도 함께 포함한다. (존 스토리, 박만준 역, 『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 (서울, 경문사, 2005)) 서양, 서양화, 서양주의의 중심이자 대표가 미국이라면 과연 동양, 동양화, 동양주의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식의 일대일 대응구조에 대해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본질을 포착하고자 하면 이는 곧 도그마화되고 화석화된다는 저자의 말처럼,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는 항구적이며 불가역적이나 이를 올바로 해석하는 일도 과연 말처럼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리엔탈리스트나 옥시덴탈리스트 모두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의 문화 개념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 문화 연구의 근본적인 원칙임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희망할 뿐이다. 스스로의 문화개념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문화 연구의 근본적인 원칙이라고 천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문화연구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 문화와 문학이라는 인식 하에서 편견과 가감 없이 나름의 문화를 충실하게 이행하자는 것이다.

이 책의 역자인 정진배 교수는 그의 책 정진배, 『중국 현대문학과 현대성 이데올로기』,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1)에서 순수한 ‘나의 관점’을 확보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용들조차 의도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모순’의 문제는 동시에 샤오메이 천의 『옥시덴탈리즘』에서도 주요한 구조적 흐름을 잇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중국 전통극을 이용해 ‘현대극’을 수립한다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는 까오싱?(高行健)은 본토 중국 전통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총체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159)

그의 연극은 브레히트적인 동시에 반브레히트적이며, 아르토적인 동시에 반아르토적이다. 이 연극은 그 둘 다인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니다.(170)

 정진배 교수가 말한 모순은 샤오메이 천에 와서는 동일한 대상이 다른 문화와 문맥 속에서 때로는 ‘A’로 또 때로는 ‘B’로 읽힐 수 있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유용한 독해와 비평의 자세임을 밝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역자와 저자 모두 파스칼이 팡세에서 지적했던 것과 같은 ‘모순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진리’ 파스칼, 정봉구 역, 『팡세』, (서울, 육문사, 1994), 202.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방식을 택한다. 우리가 까오싱?의 연극에서 ‘중국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 이러한 중국적인 특질들은 곧 탈중심화되어 정반대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까오싱?은 양쪽에 포괄적으로 속하는 작가가 되면서 동시에 그의 연극은 양쪽 모두에서 가장 클래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서양에서 너무나 동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와일더를 동양에서 서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오싱?의 비견하는 부분에서 어느 것이 영향을 주는 선배 텍스트인가 혹은 동시에 원조 전통이라 불릴 만한 것을 공유하는가하는 문제에 저자와 같이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부질없는 듯 보인다. ‘타자’인 모든 것, ‘이질적인’ 모든 것-즉 서양적인 모든 것-은 이제 그것의 적절한 맥락 속에서 인식되고 새겨져야만 하며, 21세기의 문화간 문학 연구에서 서로 다른 국가적 전통을 분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근의 많은 문학 이론들이 주장하듯이, ‘오독’과 ‘오해’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행위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부정적’이라고 생각되는 행위들이 문화사를 구성하는 수단이 되며 그리고 문화간 의사소통을 발생시키는 수단이 되고 ‘강한’ 시인이나 비평가는 자신들의 뿌리 전통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을 찾으며, 그리고 오해와 오독의 과정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편리한 수단을 제공한다(175)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여 순수하게 텍스트가 탄생한 지정학적 위치와 비평적 견해를 가지고 접근한다는 것은 역시 무리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는 이러한 상호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독자들은, 그리고 비평가들은 어떻게 비상구를 찾아 나갈 것인가. 분명 사실을 정확히 읽어내고, 말하자면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어 보이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일은 ‘오독’과 ‘오해’보다 더욱 무가치한 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지름길로 가려다가 수천 년간 다듬어 온 본질탐구를 허망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습관성 ‘오독’와 ‘오해’가 결코 그릇된 작용만 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떠한 면에서는 더 나은 ‘진리’로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중국 문학 및 문화 연구는 서양 문학 및 문화 연구와 그야말로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국학에서 세계 문학 및 문화는 더 이상 무시되거나 또는 재료나 영향에 불과한 것으로 경시될 수 없으며 또한 세계 문학 및 문화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규정될 수도 없고, 그리하여 문화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폐기될 수도 없다. 특히 문화간 교환이 점차 증대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중국학은 서양과의 접촉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서양 텍스트의 맥락과 동떨어진 채로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실로 현실적인 문제이며 21세기의 동양학 혹은 서양학을 하는 이들에게도 분명 인지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장웨이민(張未民), 「신세기 문학의 발전 특징(新世紀文學的發展特征)」, 『中國現代當代文學?究』, (北京,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中心出版, 2007.1), 48-54. 마찬가지로 이제는 중국 것에 ‘오염되지 않은’ 서양 전통을 거론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것에 더하여 이러한 상황은, 어떤 경우 최근의 중국 문학과 문화에서 옥시덴탈리즘이 긍정적, 해방적인 힘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중요한 측면을 환기시킨다. 저자는 줄곧 인상적이고도 독창적인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으며 마침내 이러한 ‘오해’와 ‘오독’에 대한 긍정적 역할을 기대하는 점은 특히 이 책의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샤오메이 천의 『옥시덴탈리즘』은 TV 다큐멘터리와 몽롱시, 서양 연극, 중국 현대극, 여성극 등 서문에 밝힌 대로 연극(話劇)을 주된 분석의 예와 오독의 사례로 제시했다. 선택이란 항상 배제를 전제한다고 했던가. 저자의 관심이 연극에만 머무르지 않고 영화 영화를 소비하는 데는 고도의 읽고 쓰기 능력이나 미학적 세련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문학이나 미술 이상으로 ‘문화 쓰기’라는 현재 진행 중인 과정에 공헌하는 바가 크며, 그 공헌은 유례가 없을 만큼 긴급하게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레이 초우 지음, 정재서 옮김, 『원시적 열정』, (서울, 이산, 2004), 54.)와 문학작품들-후기에서 『맨해튼의 중국 여인』을 언급하고는 있지만-에도 잠시 머물렀으면 하는 아쉬움은 그의 예리한 시선과 정곡을 찌르는 분석법을 더 듣고 싶은 아쉬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인 듯하다. 우리가 인식했든 인식하지 못했든 간에 ‘옥시덴탈리즘’이 등장한 이후로는 문화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측면 역시 중요한 관점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일단 발화됨으로 인해서 그것은 추상적 사유의 공간에서 현실적 담론의 공간으로 효과적으로 진입했으므로.

 
고혜림, 〈오해와 오독의 역사를 비추는 거울〉, 《코기토》62, 부산: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7,8, pp.32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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