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0.11.19
수정일
2010.11.19
작성자
현대중국문화연구실
조회수
556

(오경희 서평) 숨겨진 서사

《숨겨진 서사》大智勇者의 통찰력
- 한 인문학자가 파헤친 중국문화의 숨겨진 서사 -



숨겨진서사(戴錦華)



戴錦華, 오경희 옮김
서울: 숙명여자대학교출판국, 2006.9
                                                                                                                                                                 
                                                                                                                       오 경 희

                                                                          
                                                         거울의 성 안 문화 지형도 그리기

   본서는 1999년에 나온 베이징대학 비교문학 및 비교문화연구소 따이진화(戴錦華)교수의 역작 《隱形書寫》를 번역한 것이다. 원서는 본래 1999년에 쟝쑤인민출판사(江蘇人民出版社)에서 출간되었지만 원문의 내용이 수십여 곳 이상 삭제 편집된 부분이 있어 본서는 저자가 직접 제공한 원문파일을 번역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이에 독자들은 본서를 통해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번역을 하면서, 1990년대 중국의 복잡한 문화 상황 속에서 저자의 지식인으로서의 열정과 고뇌의 깊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은유와 수식어는 가능한 한 그대로 두어 원문의 의도에 근접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는 1990년대 복잡하고 현란한 중국 사회 문화의 변화와 중국문학을 전공한 한 인문학자의 역사와 사회, 현실 문화에 대한 고뇌와 번민, 그리고 무명초처럼 현실을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책은 영국 버밍엄학파의 학제적이고 광범위하게 확장된 문화분석 영역을 전제로 하여, 문화를 생산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관계된 전 사회적 과정으로 보고, 이에 필연적으로 개별 텍스트보다 역사 분석을 중시한다. 어쩌면 저자는 문화연구의 주제를 문화의 생산, 분배, 수용이라는 전체 과정으로 보고 그것을 구분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문화지형도를 그리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어쩌면 기존의 시각과 방법으로는 더 이상 해석이 불가능해진 중국 현실 문화의 복잡다단함이 이러한 이론적 분석과 해석의 한계마저 훌쩍 뛰어넘어 이를 전복시켜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어판 저자 서문〉의 한 단락에서 저자의 이러한 포스트 냉전시대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냉전이 정한 국경선은 ‘양대 진영’이라는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라는 경계선이다. 아시아에서, 정확히 말해 동북아시아에서 포스트 냉전 또는 전지구화의 가장 진지한 현실은 바로 이미 정체된 자본의 흐름이 옛날의 철의 장막을 넘어서서 현재의 사회주의 진영의 소재지로 진입해왔다는 것이다. 매우 풍자적인 것은 공산주의가 전면적으로 붕괴하였을 때, 마르크스가 이미 예언한 바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의 전야’라고 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가 진실로 도래한 것이다. 그것은 더욱 더 광활한 제3세계를 양산함과 동시에 옛 사회주의의 영토 위에 숫자는 많지 않지만 하나의 압박 세력으로서 신흥부호층을 양산했다. 미국을 본보기로 하는 자본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전지구화가 아시아를 변화시키는 것도 세계적 권력의 틀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자본은 국경이 없고 금전은 만능의 여권이요 신분 증명이 되어 ‘새로운’ ‘세계 시민’이라는 집단을 만들어냈다. 또 한편으로는 더욱 심화되어가는 내부충돌과 위기 아래 국가 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 냉전을 대신하여 부침을 거듭한다.

  
 저자가 주류 이데올로기로부터 돌파하자마자 소비사회의 그물망으로 빠져드는 시대로 표현한 1990년대 중국에서, 저자의 눈에 먼저 들어온 중국 현실문화의 구조는 자아와 타인, 진실과 허구를 혼돈케하는, 한마디로 색채와 선이 분명하지 않은 채 서로 겹치고 서로를 비추는, 온갖 환영이 난무하는 거울의 성이다. 저자는 이 ‘거울의 성’을 문화의 ‘공용 공간’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사용이 가능한 1990년대 문화라는 공용 공간에서 국가와 다국적 자본, 중앙과 지방, 기업과 개인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충돌하기도 하고 때로는 긴밀히 협조하기도 하는 복잡다단한 현상이 펼쳐진다. 예를 들면 이편엔 어떤 저항도 용인치 않는 국가 주류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문화시장과 문화산업 기제가 권력을 공유하며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지속되는 상반된 의의의, 그러나 같은 목적의 풍경이 공존하는 것이다.
   저자는 먼저 복잡다단함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문화의 생산 주체에 관해서 언급한다. 포스트 냉전시대에 들어선 1990년대 중국에서 단일하고 획일적인 관방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문화 현상들이 어느 정도 중국 중앙 정부의 개입과 용인 하에 이루어졌다. 중국 정부는 경전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써 사회 안정을 확보하고, 적극적인 통제와 사회 역량 동원을 통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분하에 전면적 시장화에 앞장서 다국적 자본을 도입하고, 개인 자본과 신부자층을 창조해냈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라깡의 거울단계에서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다른 사람이라고 믿는 것처럼 거울의 성 안에서 ‘중국 대 서방’으로 보이는 대립적 경관은 세계화, 지구화의 이름으로 다국적 자본의 침투를 야기하는 한편 계급 분화나 인권 등 중국 내부의 모순을 은폐시킨 채 ‘중국과 중국인’이라는 민족주의 대서사 위에 세워진 국가주의를 받아들이게 했다고 주장한다. 또 저자는 문화생산뿐만 아니라 분배와 수용에 있어서도 보이지 않는 권력이 존재함을 밝히는데 그것은 현실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현상이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부재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잊고 싶은 것으로 취급되어 단 한번도 언급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한다. 사실상 그것은 현실의 맥락에서 결코 모르는 척하거나 은폐해서는 안되는 것들이고 반드시 현재적으로 이야기하고 토론해야만 하는 것들, 예를 들면 문화대혁명의 진실한 역사, 빈부 격차라는 계급문제, 화이트 칼라의 부상과 더불어 온 블루 칼라의 몰락, 대중매체를 통해서 보여지는 현실과 담론의 괴리 현상, 언론과 미디어라는 새로운 권력의 부상,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사회 비판적 입장 등이다. 이렇듯 저자가 자주 ‘거울의 성’이라거나 ‘안개 속 풍경’으로 비유하는 중국 문화를 바로 보고 그 안에 숨은 진실을 밝히려는 저자의 탐구력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어쩌면 ‘거울의 성’은 우리가 한중수교 10여 년 동안 중국을 알고 바로 보고자했던 과정 속에서, 동북공정을 앞세운 고구려사의 왜곡 앞에서 이해하기 어렵고 다가가기 힘들었던 보이지 않는 벽이기도 하고, 한류 확산의 흥분적 기대 속에서, 개방과 자유화, 대륙 기질이라는 너그러움 앞에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중국에 대해 끊임없이, 근원적으로 가졌던 의문 -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라는 중국사회에 대한 의문과 혼란은 우리들 역시 그 거울의 성 안의 일각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보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적 맥락에서 정확하게 분석하고,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는 통찰력이 참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저자는 특유의 통찰력과 예민하고 세밀한 관찰, 깊고 넓은 지적 사유를 통해서 과열된, 또는 과잉된 거울의 성 안에 숨겨진 진실과 보이지 않았던 근원과 원류, 그리고 얽히고 설켜 해독 불가능한 현상의 갈래를 잡고 마치 신중한 의사가 환부에 메스를 가하듯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분석 비판하며 지난한 작업을 시작한다.

                                                            역사의 단절과 회고

   오늘날 중국에는 누구나 알고 있고 경험하고, 엄연히 존재하지만 말로 풀어낼 수 없는 부재의 역사와 그에 관한 금지된 기억이 있다. 마오쩌둥이 용납한 사인방과 홍위병에 의해 1966년부터 10년 동안 자행된 핍박과 학살의 문화대혁명과 저자가 본문 중에 자주 사회혼란, 진동, 격침, 적막한 침묵 등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 앞 민주화운동과 참극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1976년 4월 5일 천안문 광장의 울부짖음을 기억하고, 문혁이 끝나고 낙관과 기쁨으로 새로이 문을 연 신시기 1980년대를 기억하고, 1989년 그 일 이후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가속화 속에서 맞이한 1990년대, 그리고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와 1993년 이후의 현란한 중국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혁의 기억과 1989년의 상처는 분명 존재했던 사실이지만 발설해서는 안될 것만 같은,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진실을 가리운 채 부재한 역사가 된다. 이 사실은 1990년대 중국 문화 현실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한다. 역사의 은폐와 왜곡이 야기한 현실과 현상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또 다른 얼굴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다. 1980년대 초, 문혁의 종말이 가져다준 정치적 반성이 고루한 역사 전통에 대한 반성으로 바뀌면서 문혁 시기는 애초부터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그런 사실로서, 그저 진부하고 우매한 지난 역사로 치부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현대화된 새 시대의 상징들이 역사적 진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시장경제의 가속화 속에서 1980년대 말기에는 문화 시장과 소비사회의 등장이 이루어진다. 이후 정부가 주도하는 문화기제와 체제적 승인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금기가 문화 자원으로 소비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 된다. 마오쩌둥 붐과 문혁시대의 금기 -대자보, 어록, 홍위병 완장-, 혁명 소재의 주선율영화가 소비 시장에서 유행했다. 1990년대 초반의 마오쩌둥 붐은 국가의 의도적인 이데올로기적 조작으로서, 신격화된 마오주석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시키는 한편 국가 영수라는 신성불가침의 ‘금기’를 대중에게 소비토록 했다. 게다가 지식청년문학과 문혁 시기를 다룬 르뽀 문학은 소비주의에 편승해서 문혁이라는 역사를 규탄하기보다는 그리움과 추억, 영광과 몽상의 기록, 일종의 특례와 특허와 같은 문혁의 기억, 홍위병 운동, 하방운동과 연계되어 주류 이데올로기와 미묘한 엇갈림과 만남을 형성한다. 특히 1990년대 도시를 중심으로 퍼진 노스탤지어 붐과 복고풍은 정체성 혼란과 현실 세계에서의 도피와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혁명과 전쟁의 기억 뒤에 숨은 성애적 표현, 이런 회고의 표상은 당연히 문화 시장에서 잘 팔려나간다. 예를 들어 옛 사회주의 혁명의 표상을 이용한 기업 광고 이미지에는 분명한 이데올로기적 균열과 대립이 존재하지만 회고를 통해 세계화, 중산층적 미래, 부유하고 편안한 삶이 부각되면서 대립은 융화와 봉합으로 바뀌고 그렇게 새로 장식된 역사는 개인과 소비의 형식으로 조화와 연속성을 얻는다. 회고와 회고적 표상은 효과적인 합법화 과정이다. 이는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상상적 공간을 마련해주고 생존에 대해 모종의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는 위안과 여유를 가져다주는 돈이 되는 문화의 표상이다.

                                                    계급을 은폐시킨 민족과 가족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역사의 단절, 그리고 변화와 전환의 혼재 속에서 드러난 계급 분화가 관방의 이데올로기적 전략에 의해서 민족 충돌로 포장되고 합법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드러낸다. 현실에서는 빈부 분화가 극명한데도 거의 예외없이 계급 담론을 거부하는 대중과 그럼으로써 익명으로 존재하게 된 계급 분화의 현실 위에 민족 서사가 견고해지고 합법화되어간다. 계급 분화로 인해 날로 도시의 농촌 노동자와 중산층이라 불리는 화이트 칼라, 신흥 부호층의 부상이라는 계급 현실을 배태하는데도 계급문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충분한 합법성을 얻지 못하고 시종 익명과 결핍에 처해 있다. 저자는 계급 분화의 현실을 가리운 민족주의 서사담론을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는데 유학생 문학과 ‘NO라고 말하다’류의 베스트셀러, 그리고 외국기업에 대한 배타성 등이다.
   1990년대 초반 이래로 큰 인기를 누렸던 《뉴욕의 북경인》과《맨하탄의 중국여인》을 대표로 한 신이민의 다큐멘터리 문학은 중국인에게 세계화 속 상상의 황금빛 피안을 제공하고 중국인의 서방에 대한 특히 미국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서구에 있는 중국인의 성공담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문화의 부교 역할을 함과 동시에 민족의 우월성과 동질감을 부추기고 주인공의 성공담을 수용하는 엘리트, 영웅주의 속에서 모순된 계급 현실을 민족 서사로 대치한다. 이처럼 1990년대 민족주의의 성행 속에서 중국 사회의 계급 분화의 문제를 민족, 또는 최소한 지역적 충돌로 만들어 성공으로 전환시켰다. 또한 1990년대 중후반기 《중국은 NO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다분히 미국에 대항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서적류의 유행은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에게 애국심과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추세로 이어졌고 이어서 이는 개인의 혈연가정, 가족에의 귀속과 인정을 통해서 사회와 민족의 동일성 속으로 합쳐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사회의 현실적 위기와 신분에 대한 걱정을 성공적으로 전이시킨 것으로 그 이면에 계급 분화와 성별 질서를 재건하는 과정을 은폐하고 있다. 이는 욕망의 패배, 재조직과 해체라는 사회적 위기 속에서 중국에서 민심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 필요한 공공의 적, 자신과 다른 자의 형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회 변화 시기의 고통과 혼란과 원한을 짊어지게 하려는 주류 이데올로기적 책략이다. 민족주의는 민중에 대한 무작정 동원이 어려워진 포스트동원시대 민중에게 호소하고 이들을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방법이 된 셈이다. 한편 저자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계급분화와 빈부 극대화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소비와 대중문화 현상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의 분화는 거의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합법화 과정과 문화 패권의 실천, 정부의 의식적인 은폐와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회 비판적 입장은 문화의 부재자, 공개적, 반공개적으로 중국 지식계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정치적 금기보다 더 강력한 공유된 인식과 묵계는 역사의 흐름에 따른 현실을 인정하고 평등을 토론하는 것이 마치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역사의 후퇴를 요구하는 것 같은 의미가 되어,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계급 모순은 심각해져도 그에 관한 담론은 익명으로 자신의 몸을 숨겼다. 저자는 앞서 언급한 역사의 단절에 따른 또 다른 이데올로기 전략으로 ‘광장’의 유행과 광장을 둘러싼 담론이 야기한 계급 현실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1990년대 중국의 도시에 마천루가 등장하면서 중국 역사 속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광장이 상업화 시대 ‘플라자’(plaza)라는 이름의 높은 건물과 상가를 가리키는 현실이 도래하고 사회주의 역사와 이데올로기적 기제들이 익살과 냉소, 희롱거리로 전락하는 현상을 쓰고 있다. 1989년 사건 이후 광장은 심각한 금기, 사회주의 체제의 지표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전복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자’가 광장을 대치한 것은 적어도 군중의 집회장소로서의 광장을 은폐하는 모종의 현명한 지혜에서 나온 것이며 소비주의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계급 분화의 현실을 심화시킨다. 또 이를 합법화하고 뒷받침하기 위한 서사전략이 뒤따르는 속에서 심각한 계급적 현실은 은폐되고 명명되지 못한 채로 쌓여간다.

                                                                    지식인과 문화 실천

   이 책에서 무엇보다 저자가 시종일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반성이다. 즉 이는 본토 문화적 의미의 정치 문화 반성이며 지식인의 사회적 사명에 대한 확인, 그리고 1990년대 중국 지식계의 현실 타협과 역사 단절, 비판 역량의 소진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다. 저자는 가장 기본적인 지식인의 문화 실천을 늘 깨어서 단순화시키지 않는 태도로써 사회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중국의 지식인이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 이러한 실천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지적한다. 1980년대 초 계몽의 시대에 성공적으로 주도적 지위에 오른 지식인 집단이 ‘혁명과의 고별’이란 역사적 선택을 하고 1980년대 말기의 진동과 상처 속에서 자기모순과 실어증에 빠진 후, 자아와 세계를 확인할 담론의 상실과 파괴를 겪으면서 사회 비판의 정신 역량을 소진시켰다는 분석은 참으로 날카롭다. 게다가 1990년대 대중매체의 확산과 권력화, 대중문화의 급속한 부상 속에서 지식인은 스스로를 주변화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과 우려의 눈길이 가는 곳 한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1990년대 중국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과 지식, 그에 대한 논쟁을 포함한다. 중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문화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을 이용한 중국 변화 시기에 중요한 정치, 준정치적 실천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게다가 그것은 의식적인 오용과 오독에서 나온 자각적인 정치 문화 실천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은 엘리트 시인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근대 이후 중국의 현대화 역사를 도외시한 채 1980년대와의 결별을 선언하며 소위 ‘1980년대식’이 아닌 선봉예술, 제6세대, 통속소설, 개인스토리 같은 모든 새로운 문화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는 상업화와 문화시장화 과정 중에 드러난 세계화 도정, 다국적 자본의 진입, 새로운 권력기구의 형성, 계급 분화의 현실과 문화패권의 확립이라는 중국의 중요한 문화 현실을 은폐시켰다. 또한 1990년대에 갑자기 번창하기 시작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들은 적어도 1993년부터 1995년 사이에, 일제히 자신들을 소위 ‘중산층’, 화이트칼라의 취미와 소비 수준을 임의로 규정하면서 문화적 상상을 부추기고, 담론의 강대한 공세로써 중국의 중산층 무리는 ‘길러내고’ 그 형성을 시도했을 때 지식인 역시 ‘미디어인사’의 이름으로 매스컴을 이용해 경제적 곤궁과 정신의 위기를 탈피할 뿐만 아니라 그로써 사회의 중심을 주도한다는 상상적 지위를 누렸다. 중국에서 중산층 담론이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이, 먼저 상상을 통한 명명 후에 그에 걸 맞는 집단과 현상을 만들어내는 도치의 과정을 사회적으로 연출한 것으로 보는 저자는 이 가운데 ‘혁명과의 고별’을 선택한 중국 지식인의 사회비판 역량의 상실을 비장하게 읽어내고 있다.

                                                                     번역의 辯

   한 국가와 사회를 읽어내는 코드가 왜 하필 대중문화인가라는 의문은 어쩌면 우문일 것이다. 그것은 문학 텍스트와 문학이론이 포착하거나 담아낼 수 없는 유치함과 우매함, 탐욕과 더러움을 포괄할 수 있다는 이유로 더욱더 인간의 진실함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숨은 인간 삶의 방식과 모습을 탐구하며 모순된 자아를 인식하고 그 모순의 집합체로서 도저히 해독 불가능한 세계를 이해하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더 할수록 번역은 말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심리까지도 잘 옮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밀려왔던 것 같다. 제3세계의 현실과 담론의 간격과 차이의 지점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저자의 사유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에는 ‘내’가 경험했던 우리 사회의 1980년대와 1990년대가 책의 내용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내 앞에 버티고 있기도 했다. 올림픽을 앞둔 중국과 중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에 이르고, 동아시아의 공유와 소통, 또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최근의 분위기 속에서 정작 우리가 보아야 할  보이지 않는 것들은 무엇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오경희, 〈오경희 옮김,《숨겨진 서사》〉, 《중국어문학》49집, 경산: 영남중국어문학회, 2007.6, pp.489-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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